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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피해실태

위안소 밖까지 줄을 서서 기다리는 일본군들, 군인을 달래는 ‘위안부’ (연회에 참석하여 노래를 하거나 춤을 춤), 중각 숭산의 한 언덕에서 연협군에 포로가 된 ‘위안부’들, 1937년 양가의 위안소‘위안부’들

위안소란?

  • 일제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일본 군부대에 위안소를 세우고 식민지 조선과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점령지의 여성들을 강제로 끌고 가 군인들의 성노예로 삼았다. 일본군 '위안부'를 설립한 목적 중 하나는 일본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서였다. 전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군인들은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사기가 저하되었는데, 그것을 해결해 주는 방법으로 성적 욕구를 풀수 있게 해 준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근본적인 목적은 점령지에서의 성폭행 사건을 막기 위해서였다. 일본군은 점령지에서 약탈, 방화, 성폭력 등 여러 문제들을 일으켰는데, 주민들로부터 반일 감정을 폭발시켰다. 점령지 통치가 곤란해지자 이를 예방하기 위해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도입하게 되었다.

    위안소는 설립, 운영, '위안부' 모집에 있어서 군이 직접 하거나 민간에 위임하여 시기와 장소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나타냈으나 어느 경우에나 군대의 보호와 감독, 엄격한 통제를 받았다. 위안소를 민간이 설립한 경우, 군위안소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군의 허가를 받고, 군으로부터 면허증을 교부받아야 했다.

    군위안소는 위생도구와 '위안부'에 대한 군의관의 정기검진을 군으로부터 제공받았으며, 군이 정한 위생, 청결사항을 엄수해야 했고, 군에서 정한 위안소 규정을 따라야 했다. 정기적으로 군에 업무보고를 하도록 했고, '위안부' 이동까지도 군의 명령에 의해 이루어졌다.

일본군 '위안부' 모집

  • 강제동원으로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첫째, 일반적으로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물리적 폭력에 의한 연행이다. 할머니들의 경우, 일본 군인이나 경찰 등에게 친구와 놀다가 혹은 집에서, 들에서 무조건 트럭에 태워지거나 연행된 경우가 포함된다. 다음으로,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강제적 통제에 의해 갈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연행된 것이다. 즉, 인신매매, 유괴, 취업사기 등으로 일본군 '위안부'가 된 경우를 말한다.

    그러나 군인이나 경찰 등 정부기관 등의 물리적 폭력과 협박에 의해 갔거나 후자에 의해 연행되었거나 간에 이들은 모두 자신이 '위안부'가 될 것이라는 것은 모른 채 동원되었다. 설사 민간업자의 취업사기에 의해 연행되었다 할지라도 연행도중 엄격한 감시와 통제 속에 있었고, 위안소에서는 탈출도 할 수 없도록 감시하고, 관리를 받았다. 즉, 일본군 '위안부'의 동원은 물리적 폭력에 의해 연행되었거나 취업사기나 인신매매등에 의해서 연행되었거나 간에 모두 강제동원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위안소의 생활

  • 하루에 적게는 5명에서 많게는 60명의 일본 군인에게 성폭행을 당했으며, 군인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바람에 몸을 씻을 수도 먹을 시간도 거의 없었다. 열악한 환경에서 말라리와와 결핵, 성병 등에 걸려 목숨을 잃기도 했다. 생리를 하거나 임신 중인 소녀도 성폭행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심지어 임신을 해 활용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는 소녀들은 총살을 시켜버리기도 하고, 총살을 당하지 않으면 낙태를 시켜 다시 위안소로 돌려보냈다.

    일본군 '위안부'의 가치는 오로지 군의 사용방안에 따라 결정되었다. 마음대로 위안소를 떠날 수 없었고, 기본적인 이동의 자유까지 박탈되었다.

해방 후의 일본군 '위안부'

  • 일본이 전쟁에서 패하자 일본군 '위안부'들은 버려졌다. 일본군은 그녀들을 전쟁터에 그대로 버려두기도 했고, 나중에 이 일이 알려질 것을 염려해 한 데 모아 죽이기도 했다.
    많은 소녀들이 희망을 버리지 않고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며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고향에 돌아가지를 못했다.

    위안소에서 구타와 고문, 성병감염, 인공유산, 불임수술, 자궁적출 등의 폭력과 고문으로 인해 전쟁 후에도 생존자들은 신체적,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다. 육체적 고통 뿐 아니라 정신적 고통도 상당히 심각하여 밤에도 불을 켜 놓고 자야 했으며, 악몽에 시달리거나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진실을 밝힐 수 없어 할머니들의 상처는 안으로만 썩어 들어갔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세상에 드러난 과정

  •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고 파헤치기 시작한 사람은 윤정옥 선생님이다. 윤정옥 선생님은 일본군 강제 징집 상황에 대해서 알고 있어서 자신은 피할 수 있었지만, 다른 친구들이 끌려간 것에 대해 많은 책임의식을 느끼고 해방 후 오랜 시간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연구를 하였다.

    1988년 '여성과 관광문화 세미나'에서 윤정옥 선생님에 의해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세상에 드러났다. 이후 1990년 11월 16일,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한국교회여성연합회' 등 37개 여성단체가 모여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운동 단체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결성하였다.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께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중 최초로 공개 증언에 나섰다. 같은 해 12월 6일 다른 두 명의 피해자와 함께 일본 정부를 상대로 피해보상 청구소송을 했다. 이 소송으로 인해 국제사회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출 처 : 할머니 우리가 기억할게요 - 초등학생 교육을 위한 일본군 '위안부' 자료집 2012
2012년 여성가족부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공동협력사업으로 제작
- 일본군 '위안부' 10문 10답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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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부서 :
중등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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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등장학
이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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