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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를 더하다

6·25전쟁 반격의 시작 ‘마산방어전투’

6·25전쟁 반격의 시작 ‘마산방어전투’


한 미 힘 모아 죽음으로 지킨


‘최후의 방어선’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 남침 이후 불과 한 달여 만인 8월 1일 최후방 진주까지 점령당한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협받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마산과 창녕을 비롯한 낙동강 방어선이 무너지면 곧바로 부산이 함락되면서 대한민국은 자유를 잃고 공산화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패배했다면 대한민국의 역사가 지워져 버렸을지도 모를 중차대한 그 전투를 다시 한번 되새겨보기 위해 그때 그 현장을 찾았다.


 


마산방어전투 당시 한국 민간 지원자(지게 부대)들이 탄약과 식량을 가지고 서북산으로 이동하고 있다. *미25사단 제공


마산방어전투 당시 한국 민간 지원자(지게 부대)들이 탄약과 식량을 가지고 서북산으로 이동하고 있다.


*미25사단 제공




죽음으로 지킨 자유


 


1950년 8월 1일 북한군은 남침 한 달여 만에 진주를 점령한 데 이어 당시 마산 현동 검문소에 집결했다. 북한군 정예 6사단 7,000여 명은 함안·진동 고산지대를 확보한 후 마산 점령을 노리고 있었는데, 당시 이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은 1,000여 명에 불과했다. 미 8군 사령관인 워커 중장은 급히 경북 상주에 주둔 중인 미 25보병사단을 250㎞ 넘는 마산으로 단 이틀 만에 급파시켰다. 이에 맞춰 진주에서 후퇴한 미 24사단도 창녕에 낙동강 방어선 진지를 구축했다. 마산을 점령하려는 인민군과 사수하려는 한-미 연합군은 8월 1일부터 9월 14일까지 45일간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한 미 연합군 1,000여 명, 북한군 4,000여 명 등 무려 5,000여 명이 전사했다.


마산방어전투에서는 군번도 계급장도 없이 전장을 누볐던 숨은 영웅 ‘지게부대’도 활약했다. 지역 민간인들로 구성된 지게부대는 국토의 70% 이상인 산악지대를 누비며 최전방까지 탄약과 식량, 전투장비, 의복 등을 운반했다. 총탄이 빗발치는 치열한 전투 현장에서 죽음을 무릅쓴 위험한 임무였고, 이들의 숨은 희생은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일이다.


 


1950년 8월 미군이 마산 방어를 위해 인근 산 정상에 오르고 있다


1950년 8월 미군이 마산 방어를 위해 인근 산 정상에 오르고 있다


 


마산방어전투 중 가장 치열했던 서북산에서 미군이 북한 진지에 사격을 하고 있다.


마산방어전투 중 가장 치열했던 서북산에서 미군이 북한 진지에 사격을 하고 있다.


 


 


적은 ‘최정예 부대’


 


당시 마산으로 진격했던 북한군 6사단은 말 그대로 ‘최정예 부대’였다. 전쟁 전문가들은 6사단을 이끈 방호산을 적의 지휘관 중 가장 뛰어난 전술가이자 전략가로 평가한다. 방호산은 16살 때 중국으로 넘어가 항일독립군으로 활동했고, 이후 중국 공산당 추천으로 모스크바 동양대학 조선반에 입학해 수료했다. 


중국으로 돌아온 그는 게릴라 전법을 담당했고, 광복 후에는 조선 의용군 사단 창설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해인 1949년 방호산은 인민군 6사단장으로 임명돼 곧장 사단급 훈련에 매진한다.


방호산은 그야말로 ‘초엘리트’ 과정을 거친 군사전문가였고, 그가 이끄는 6사단 또한 최정예 부대였다. 6사단은 전쟁 발발 1년 전까지 중국 공산군 동북의용군 56군단 166사단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국공내전’에 참전했다.


중국 마오쩌둥은 1949년 6월 국공내전이 끝나자, 김일성에게 방호산을 포함한 사단을 넘겼다. 조선족으로 구성된 6사단은 국공내전을 겪었기에 전투 경험이 풍부했다. 


인민군 소속이 된 이후에는 각종 무기의 사격 훈련을 비롯해 산악·야간훈련을 실시했다. 이들의 집중 훈련은 전쟁이 터지기 직전까지 계속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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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방어전투 당시 아군의 지휘본부였던 진동초등학교


 


 


19번 주인 바뀐 서북산 고지


 


당시 마산방어전투의 요충지였던 해발 739m 서북산은 고지 주인이 19번이나 바뀌었고, 이 과정에서 1,000여 명의 아군이 전사했다. 서북산 정상은 미 해군의 수없는 함포 사격과 공군 전투기의 네이팜탄 폭격으로 나무가 사라지고 정상부가 깎여 미군은 이 산을 ‘늙은 중머리 산’, ‘네이팜산 언덕’이라고 불렀다.


서북산 전투 당시 미군의 로버트 리 티몬스 대위는 중대원 100여 명과 함께 고지를 지키던 중 인민군 습격으로 부상을 입었고, 후송 중 기관총 공격을 받아 전사했다. 티몬스 대위 시신은 1년 뒤에 발견돼 미 워싱턴의 알링턴국립묘지에 안장됐다. 그는 지난 2020년 11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되기도 했는데, 전사 당시 티몬스 대위에게는 7살 아들이 있었다. 아들인 리처드 티몬스는 아버지를 이어 군인이 됐고, 이후 주한 미 8군 사령관으로 한국에 부임한 후 서북산을 찾아 아버지를 기렸다.


육군 39사단은 1995년 12월 로버트 리 티몬스 대위를 기리는 추모비를 산 정상에 세웠고, 함안호국공원에서도 흉상과 기념비로 만날 수 있다. 


티몬스 대위 손자도 미 육군 대위로 한국 근무를 자원해 1996년부터 1997년까지 판문점 인근 미 2사단 최전방 초소에서 근무했다. 3대에 걸쳐 대한민국 자유와 평화를 지킨 것이다.


함안호국공원의 로버트 리 티몬스 대위의 흉상


함안호국공원의 로버트 리 티몬스 대위의 흉상


 


로버트 리 티몬스 대위의 흉상이 있는 함안호국공원


로버트 리 티몬스 대위의 흉상이 있는 함안호국공원




반격의 시작 ‘마산방어전투’


 


만약 아군이 마산방어전투에서 패배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인민군 6사단장 방호산 소장이 “마산을 점령하면 적의 숨통을 조르는 것이다”고 말했을 정도로 당시 마산은 전략적 요충지였다. 마산과 당시 임시수도인 부산까지는 직선거리로 40~50㎞에 불과했다. 마산에서 패배했다면 부산이 위험했고, 전세를 역전시킨 인천상륙작전도 힘들어졌을 수 있었다. 


결국 마산방어전투에서 거둔 한 미 연합군의 승리로 인민군의 부산 점령을 막을 수 있었고, 국군과 UN군이 재정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이어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개전 초기 불리한 전세를 뒤집고 북으로 진격하며 반격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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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진동리지구전첩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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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진동리지구전첩비가 있는 공원




반격의 발판 ‘그 며칠’


 


개전 초기 김일성은 남한 점령을 서두르려고 병사와 장비를 충원해 주며 진격을 재촉했지만, 파죽지세로 마산을 향하던 북한 6사단이 갑자기 호남지역에서 진격을 멈췄다. 호남지방에는 북한군과 맞설 국군 병력이 거의 없었음에도 신속히 움직이지 않은 것이다. 결과적으로 북한 6사단이 주춤했던 ‘그 며칠’은 대한민국을 구한 소중한 시간이 됐다. 


허남성 국방대 명예교수는 “6사단이 전주에 도착한 것이 7월 20일이다. 곧장 마산으로 진격했으면 7월 24일에는 진주를 함락시킬 수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6사단은 7월 24일에 남원에 있었고, 방어 병력이 없었던 진주로 곧장 진격하지 않았다. 오히려 순천으로 이동했고, 이후 6사단은 한참이 지난 8월 1일 진주를 점령했다. 6사단이 진격을 늦춘 이유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미 25사단이 마산으로 이동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셈이었다. 6사단이 지체한 ‘그 며칠’은 대한민국에는 천운의 시간이었다.


 


창원시 마산합포구 서북산 감제고지에서 39사단 장병들과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2작전사 유해발굴팀원들이 6·25전쟁 전사자 유해발굴을 하고 있다.


창원시 마산합포구 서북산 감제고지에서 39사단 장병들과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2작전사 유해발굴팀원들이 6·25전쟁 전사자 유해발굴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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