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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를 더하다
진주 형평운동의 흔적을 찾아서
진주 형평운동의 흔적을 찾아서…
수천 년 이어진 신분 차별의 벽을 허물다
“백정도 사람이다. 백정도 함께 예배 볼 권리가 있다.”
길고 긴 세월, 멸시와 천대에 시달리던 백정들과
그들의 처지에 공감했던 뜻있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 펼친 진주 형평운동은
수천 년에 걸친 우리 사회의 신분 차별을 뿌리 뽑는 계기가 됐다.
이후 들불처럼 일어난 형평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고,
우리나라 인권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업적으로 평가된다.
형평운동의 시작 ‘진주교회’

진주교회
1909년 진주교회에서 시작된 형평운동은 백정이던 신도들에 대한 다른 신도들의 ‘동석예배 거부’가 발단이 됐다. 진주에 처음 세워진 교회는 1905년 호주의 의료 선교사였던 커렐 목사가 세운 옥봉리교회(현 봉래동 진주교회)인데, 이 교회에서는 원래 일반인과 백정들이 따로 예배를 보았다. 그러다가 1909년 부임한 라이얼 목사가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나 차별 없이 평등하다”며 백정 신도들도 일반 신도들과 함께 예배 보기를 권했고, 이에 15명의 백정 신도가 일반 신도들의 예배에 참석했다. 하지만 당시 200여 명의 신도 중 라이얼 목사의 뜻에 따르던 30여 명 외 나머지 신도들은 백정들과 함께 예배드릴 수 없다며 교회를 떠났다. 이 ‘동석예배 거부 사건’은 백정들에게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대우받을 수 있다는 희망’과 함께, ‘당시의 차별적인 사회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좌절을 동시에 안겨줬지만, 훗날 형평운동으로 발전하게 되는 사건이기도 했다. ‘동석예배 거부 사건’ 이후 스콜스와 켈리 두 선교사의 설득으로 일반 신도들과 백정 신도들이 화해하고, 그해 8월부터 함께 모여 예배를 보게 되었는데, 이는 신분 차별을 없애는 계기가 된 역사적인 일이었다.
형평 창립 축하지

형평 창립 축하지에 세워진 조형물
진주시 대안동에 위치한 한 건물(옛 진주극장, 현 J-CITY) 앞엔 ‘형평사 창립 축하식이 열린 곳’을 기념하는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1923년 4월 24일 백정을 포함한 80여 명이 모여 ‘형평사 발기총회’를 열고, 형평사 주지(취지문)를 채택했다. 형평사 주지는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은 인류의 본량이라. 그러므로 우리는 계급을 타파하며, 모욕적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야”라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형평사가 창립된 장소는 확인할 수 없지만, 그해 5월 13일 형평사 창립 축하식이 진주좌에서 열리면서, 그 위치에 형평운동기념사업회가 ‘형평사 창립 축하식이 열린 곳’을 알리는 기념탑을 세웠다. 이후 그곳에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면서 건물주 측에서 기념탑을 없앴는데, 나중에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니, 건축조형물에다가 당시의 비문을 옮겨 적어 ‘형평사 창립 축하식이 열린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했다. ‘새로운 아침 2004’란 이름이 붙은 이 조형물은 천원식 작가의 작품으로 백정들의 신분해방운동(형평운동)을 상기하는 역사적, 기념비적인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형평 창립 축하지에 세워진 조형물 내용
백정에 대한 신분 차별이 얼마나 심했는지는 기생들과 얽힌 일화에서도 전해진다. 당시 형평사가 창립하면서 기생들에게 축하 노래를 해달라고 요청했는데, 기생들이 백정들 앞에서는 노래를 부를 수 없다며 거절했다는 이야기다. 백정과 함께 ‘칠반천인(노비·기생·상여꾼·갖바치·무당·백정·영인)’에 속했던 기생조차도 백정을 위해서는 노래할 수 없었다고 하니, 당시 사람들의 백정에 대한 차별적 인식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는 일화다.
형평운동기념탑

형평운동기념탑

형평운동기념탑의 남녀 조형물
형평운동기념사업회가 1923년 진주에서 일어난 ‘형평운동’을 기리기 위해 국내외 1,500여 명의 성금을 거둬 1996년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일에 건립해 진주시에 기증한 탑으로, 멸시와 천대에 시달리던 백정들과 그들의 처지에 공감한 사람들이 힘을 모아 펼친 진주 형평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우리나라 인권운동의 금자탑이다. 형평운동기념탑은 조선시대 최하층 천민이었던 백정들의 신분 해방과 인간 존엄의 실현을 도모한 ‘형평사’의 활동(1923~1935)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진주형평운동기념탑’은 당초 형평사 창립 축하식이 열렸던 옛 진주극장 앞에 세우려 했지만, 부지가 협소하고 땅값도 비싸 진주성 동문 인근으로 변경됐다. 비록 외성이긴 하지만 수백 년 동안 진주성 안에 들어갈 수 없었던 백정들의 한을 달래주는 의미도 있었다. 이후 ‘진주대첩 기념광장 조성사업’이 시작되면서, 2017년 경남문화예술회관 앞으로 임시 이전하게 됐다. 하지만 형평운동기념사업회를 비롯한 진주의 지역사회에서는 원위치로 돌려놓기를 촉구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형평운동가 강상호 묘소

형평운동가 강상호 묘소 이정표

형평운동가 강상호 묘소
일제강점기 사회운동가였던 백촌(栢村) 강상호(1887~1957) 선생은 1907년 진주에서의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했고, 진주 봉양학교와 일신고등보통학교 설립에 참여했다.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진주지역에서 3월 18일 만세 시위를 주도했는데, 일제 경찰에 검거돼 복역한 후 민족 교육운동을 했고, 1923년에는 형평사 결성에 참여했다. 강상호 선생은 진주의 자산가였는데, 사회 운동을 하던 이학찬이 백정이라는 이유로 자녀를 학교에 보내지 못하는 것을 보고, 형평운동에 적극 동참해 장지필 등과 함께 1923년 형평사를 결성했다.
강상호 선생은 천석꾼 양반 지주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세상에서 가장 차별받는 이들을 위해 헌신했다. 유복한 환경 덕에 신학문을 접하면서 사회운동에 눈을 떠 국채보상운동과 3·1 만세운동에 참여해 옥고를 치렀고, 백정들에 대한 차별에 눈감지 않고 형평사 창립을 주도해 전 재산을 바쳐 형평운동에 매진했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좌익으로 몰려 말년에는 가난하게 생을 마쳤는데, 장례식 때 그의 상여 뒤로 그가 평생을 두고 사랑했던 백정과 바람에 휘날리는 만장(輓章)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고 한다.
남성당한약방

남성당한양방
1992년에 형평운동기념사업회 결성을 주도했고, 2004년까지 회장을 맡았던 김장하 선생이 운영했던 한약방이다.
선생은 1992년 형평운동기념사업회를 주도적으로 만들어 초대 이사장을 맡을 정도로 형평운동에 힘을 쏟았고, 초기 형평운동가였던 강상호 선생이 돌아가신 지 40년이 다 되도록 아무도 그 흔적을 찾지 않았을 때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그의 묘를 찾아내 비석을 만들어 보존한 숨은 인물이기도 하다.
나지막하게 세워진 비석 앞면에는 ‘백촌강상호지묘’라고 쓰였고, 뒷면에는 ‘모진 풍진의 세월이 계속될수록 더욱 그리워지는 선생님이십니다. 작은 시민이’라고 적혀 있다. 그 ‘작은 시민’이 바로 김장하 선생이다. 김 선생은 강 선생처럼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사회적 약자를 위해 헌신하고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삶을 살면서도 명예를 추구하지 않고 청빈하게 살았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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