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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를 더하다
해병대통영상륙작전
통영에서 시작된 ‘귀신 잡는 해병대’의 신화
해병대통영상륙작전

해병대통영상륙작전기념관이 위치한 원문공원
통영상륙작전은 1950년 6·25전쟁 발발 후 후퇴를 거듭하던 국군이 당시 해병대를 이끌던 김성은 부대장의 지휘 아래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는 통영반도에 국군 최초로 적전상륙작전을 감행, 국군의 힘만으로 적의 점령지를 탈환하고 반격의 포문을 연 기념비적인 작전을 말한다.
1950년 8월 전선은 통영을 점령한 북한군이 거제도까지 점령하려 하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이에 해병대는 통영에 상륙해 적을 섬멸하는 작전을 감행했는데, 성공적으로 상륙한 해병대는 치열한 전투 끝에 통영 읍내에 있는 북한군을 소탕하고 패퇴시켰다.
해병대는 이 작전에서 북한군 469명을 사살하고 수많은 무기를 빼앗는 등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이 작전은 우리 해군·해병이 최초로 성공시킨 단독 상륙작전이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으며, 당시의 눈부신 전과를 바탕으로 ‘귀신 잡는 해병대’란 말이 생겨났다.

원문공원 내 통영지구 전적비
상륙 당시의 전황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한 후 북한군은 파죽지세의 기세로 남하했고, 진주와 고성을 거쳐 8월 16일 통영에 이르자 17시경 원문고개를 방어하던 경찰 100여 명은 북한군의 공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한산도로 후퇴했다.
당시 해병대 김성은 부대는 진동리 전투를 마치고 진해로 이동해 대기하던 상황이었는데, 이때 해군본부로부터 북한군이 거제도까지 점령하려고 하니 목숨을 걸고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부대원 370여 명은 그날 16일 밤 22시경 해군의 FS평택함 등에 나눠 탑승 후 거제도 인근 통영 동북방에 있는 지도(종이섬)에 도착했고, 17일 새벽 통영 용남면 지도 동쪽 기슭에서 민간인 어선 2척을 이용해 인근을 정찰했다.
당시 통영 읍내를 점령한 북한군은 650여 명(후속부대 300여 명)으로 해안지대와 망일봉에 진지를 구축했는데, 17일 오후 5시 30분경 통영으로 진격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자 정황을 분석한 김성은 부대는 주변 마을의 목선 20여 척을 징발해 22시경 통영 용남면 장평리 견유부락 해안에 기습상륙했다.

통영상륙작전을 이끌었던 김성은 장군과 당시 작전함에 대한 설명

해병대 통영상륙작전 전개 과정
상륙 성공으로 통영 탈환
상륙에 성공한 해병대는 현 용남초등학교에 진지를 구축하고 18일 03시경 일제히 총공격을 개시했다. 선발 2중대는 삼봉산(246고지)을 거쳐 진격해 07시30분경 원문고개를 탈취, 확보하면서 적의 퇴로와 진입로를 차단했다.
같은 시간 7중대는 당시 통영읍이 가장 잘 보이는 망일봉(148고지)을 북한군보다 5분 먼저 점령해 아침 떠오르는 해를 등졌고, 뒤늦게 올라오며 마주 보는 햇빛의 눈부심에 허둥대는 적 100여 명을 제압했다. 상륙 이후 통영 남쪽 해안으로 이동해 대기하던 해군 함대들은 아군 작전 성공을 위해 북한군 부대를 향해 유도 포격하며 적의 눈을 돌려 전투를 도왔다. 당시 여황산(178고지)으로 공격해 나가던 3중대는 탄약이 부족해 소강상태에 빠졌지만, 다음 날 해군 1개 중대와 탄약을 다시 보급받아 19일 북한군에게 빼앗긴 통영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해병대는 이후 원문고개에 강력한 방어 진지를 구축해 수차례에 걸친 북한군의 공격을 격퇴하면서 진지를 사수했다.
이로써 해병대통영상륙작전은 적 469명을 사살하고, 포로 83명을 생포하는 큰 전과를 올렸으며, 아군은 전사 19명, 부상 47명에 그쳤다. 상륙작전을 위해 군수품 운반을 도왔던 장평리 마을 주민들은 40~60대와 여자 초·중학생이 대부분이었는데, 지게로 쌀가마니를 나르고 박격포탄을 이고 지고 운반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 원문고개에 있는 전승비에는 민간인 여자들이 탄약을 이고 지고 나르는 모습이 부조로 새겨져 있는데, 이렇듯 원문고개 전투는 민관군이 합동으로 이뤄낸 값진 승리로 기록됐다.

해병대통영상륙작전 당시 전투 상황에 대해 설명 중인 김승봉 관장
상륙작전의 주역 김성은 장군과 고종석 하사
1924년 12월 창원에서 태어난 김성은 장군은 해군 소위로 임관했는데, 1949년 4월 진해에서 창설한 해병대의 핵심 멤버였다. 만 28세에 장군(준장)으로 임명된 그는 통영상륙작전은 물론 영덕·안동지구작전, 홍천·가리천·화천지구 전투 등에서도 전공을 세워 태극무극훈장, 미 은성무공훈장과 공로훈장 등을 받았으며, 이후 대한민국 제15대 국방장관을 역임했다.
통영상륙작전의 치열한 전투 중 누구보다 용감히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고종석(1931년 경기도 개성 출생) 하사는 해병 2기생으로 7중대 1소대 1분대 소속이었는데, 체구는 작았지만 행동이 민첩하고 대담해 뛰어난 용명을 갖추고 있었다. 진지로 쇄도해 오는 적들과 치열한 백병전을 치르며 적의 총검에 목이 찔려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는데, 그의 옆에는 대여섯 구의 북한군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김성은 대장은 그의 용명과 충심을 높이 사 2계급 특진을 상신했는데, 건군 이래 최초로 2계급 특진의 영예가 주어졌다.

해병대통영상륙작전기념관 내 전시시설
해병대 신화의 시작
‘싸우면 반드시 승리한다’는 ‘무적해병’의 신화를 이어온 대한민국 해병대는 삼면이 바다인 한반도의 지리적 특성상 수륙양면작전의 필요성이 대두돼, 1949년 4월 15일 현재의 창원시 진해구 덕산동에 위치한 진해 해군기지의 진해비행장(덕산비행장)에서 해군에서 선발한 380명(장교 26명, 부사관 54명, 병 300명)의 병력으로 창설됐다.
창설 직후의 해병대는 당시 기승을 부리던 공비들을 신속히 토벌하는 임무를 담당했는데, 초기에 진주에서 조선인민유격대를 토벌하기도 했다. 또 해병대는 1950년 빨치산이 기승을 부리던 제주도에도 투입됐는데, 바로 4·3 사건이었다. 당시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했는데, 제주 청년들은 자신들이 공산주의자로 몰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 해병대에 입대하는 일이 많았다.
해병대는 6·25전쟁 당시엔 2개 대대에서 1개 연대 정도 규모로 참전했는데, 이후 꾸준한 성장을 통해 현재는 2개 사단과 2개 독립여단 등을 거느린 군단급 부대로 거듭났다. 대한민국 해병대는 중·장기적으로 해군에서 독립한 육·해·공군, 해병대의 ‘4군 체제’를 계획하고 있다.

해병대통영상륙작전기념관 아래 충혼관

해병대통영상륙작전기념관 아래 충혼탑
해병대통영상륙작전기념관
대한민국 해병대가 단독으로 성공한 최초의 상륙작전을 기념해 지금의 통영시 원문공원 내에 건립했다. 연면적 316㎡ 부지에 지상 2층으로 디오라마관, 김성은 장군 유품전시관, 해병대상륙작전 유물전시관, 체험시설, 야외전시장 등을 갖추고 2011년 8월 17일 개관했으며, 2018년 5월 10일 현충 시설로 지정됐다. 전시관 외부에는 당시 사용했던 무기와 퇴역한 해병대 전차, 장갑차 등이 전시되고 있고, 인근에는 당시 전투가 벌어졌던 원문고개와 통영지구전적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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