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를 만나다
막내딸 보는 마음으로 지역사회 돌보는 국가유공자 ‘기부왕’

사천 김정웅 어르신
울거나 떼쓰는 일 한번 없던 순한 막내딸. 보기만 해도 배부르던 그 고운 아이는 예고도 없이 일찍 부모의 곁을 떠났다.
막내딸 ‘영채’의 이름을 되새기고 또 되새기며 그에게 못 해
준 것을 대신하듯 장학금으로 지역사회를 돌보는 한 사람.
사천의 김정웅 어르신을 만나 기부로 ‘진짜 부자’가 된 이야기를 들어봤다.
*베트남전쟁 1960년에 결성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이 베트남의 완전한 독립과
통일을 위해 북베트남의 지원 아래 남베트남 정부와 이들을 지원한 미국과 벌인 전쟁.
한국은 베트남전쟁에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병했다.
*한국전쟁 1950년부터 1953년까지 같은 민족인 남한과 북한이 싸운 전쟁.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 전쟁은 휴전 협정을 맺을 때까지 약 3년간 지속되었다.

막내딸
'영채' 이름으로
이룬 것들
김정웅 어르신을 짧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은 두 개다. 하나는 ‘베트남전쟁 참전 국가유공자’, 하나는 ‘기부천사’. 베트남전쟁에 참전했을 당시가 22세, 기부를 실천하기 시작한 것이 75세 즈음이니 50년 넘는 세월만큼이나 멀리
떨어진 일 같다가도, 참전과 기부는 생각보다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가 주요 기부 대상자로 정해둔 이들이
바로 베트남 등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아이 둘을 키우는 한부모가정의 이야기를
듣고 도와주기 시작했지요. 알음알음 사연 있는 집들을
돕다가, 어느 해부터는 그냥 학교에 전달했어요. 형편이
어려운 한부모가정, 다문화가정 아이들을 도와달라고요.”
김정웅 어르신의 마음 씀씀이가 5년째 가닿는 곳은 사천
서포중학교와 곤양중학교. 금액으로 따지면 연간 1000만 원에서 4000만 원을 오가는 돈을 장학금으로 쾌척하고 있다. 나눔의 계기에는 또 다른 아픈 사연도 깃들어 있다. 그가 장학금 전달을 위해 만든 ‘영채장학회’ 속 ‘영채’
라는 이름. 바로 그의 막내딸이다.
“1남3녀 중 막내지. 유치원 입학도 못하고 그랬으니
여섯 살인가 일곱 살이었을 거예요. 얼마나 착했는지, 초
저녁에 자면 아침에 딱 일어나, 뭐가 갖고 싶어도 ‘안 된다’ 한마디 하면 떼도 안 썼어요. 그러니까 나는 다른 아이들한테 베풀 수밖에 없어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예쁜 막내딸 영채가 불의의 사고로 곁을 떠나던 날. 자그맣던 몸은 한 줌의 재가 되어
아버지의 손에 들어왔다. 아이를 바다에 떠나보내던 날, 그때가 생각나는 듯 김정웅 어르신은 양손을 동그랗게
모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오륙도를
다시 보겠다는
마음으로
1945년 해방부터 6.25까지. 전쟁의 역사를 겪은 여느 세대가 그랬듯 김정웅 어르신의 삶도 오래도록 고단했다.
1943년생으로 어린 시절 6.25를 겪고, 초등학생 때는 ‘아이스케키(아이스크림)’를 팔아가며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고자 애썼다. 중·고등학교는 야간을 다녔는데, 지금도
그때의 어둑어둑한 하굣길이 눈에 선하다.
“집이 진주 인사동이었는데 그때는 길이 포장도 안
돼 있고 험했어요. 야간 수업을 마치면 밤 10시, 11시가
되는데 2km 가까운 비포장 도로를 걸어다녔습니다. 왕복으로 치면 네 시간쯤 되지요. 가다 보면 잠도 오고, 졸려서 돌부리에 걸려 자빠질 때도 있고 그랬어요.”
그마저도 졸업을 하지 못한 채 고등학교 3학년, 자원 입대로 육군에 갔다. 당시 복무 기간은 31개월. 제대 한 달을 남겨두고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다.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선발대로 가서 헌병대와 미 육군 범죄수사대 CID의
업무를 도왔다. 다리 밑에서 보초를 섰던 기억, 장군들을
수호하며 무사히 비행기를 태워 보내느라 애먹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무엇보다 생생한 장면은 베트남으로 떠나던 날의 풍경이다.
“우리가 선발대로 갈 때 부산 오륙도에서 갔거든요.
배를 탄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오륙도가 다섯 개로 보였다, 여섯 개로 보였다, 아른아른해요. 그렇게 출발하면서 제가 생각하기로 ‘아, 내가 죽어 올지 살아올
지 모르겠구나’… 저는 눈물을 잘 안 흘리는데 마음으로
울면서… ‘이 오륙도를 다시 볼 것이냐’ 그런 생각으로 떠났던 기억이 나요.”
이후 ‘군인 김정웅’은 상이 6급으로 전역했고, 남동생도
참전했다가 한국에 돌아온 뒤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전쟁의 상흔이 삶 곳곳에 남았지만, 그것이 삶을 지배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았다.
군인 운전면허를 취득해 군수 물자를 운반하는 일도 했
고, 이후에는 진주 삼현여고 행정실에서 30년 동안 일하며 주말에는 농사도 지으며 살았다. 부지런히 삶을 일구는 가운데서도 꾸준히 기부를 꿈꿨고, 칠순이 넘고부터
조금씩 실천할 수 있었다.

01 서포중학교 영채장학금 전달식(2022.5.)

02 사천교육지원청 기부천사 감사패 수여(2022.12.)
'진정한 부자'가 된
어른 김정웅
요즘 가장 기쁠 때는 장학금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아이들을 만나거나 감사 편지를 받는 순간이다. 학교의 요청으로 장학금 전달식을 갖기도 하는데, 평소 책이나 잡지에서 읽었던 내용을 기억해 학생들에게 전하기도 한다.
이런 교육 기부를 인정받아 사천교육지원청으로부터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고등학교 가기 전에 하고 싶은 게 많았는데 장학금
덕분에 이뤘습니다’ 하는 편지를 받으면 더 이상 뿌듯할
수가 없지요. 내가 어린 시절 편하게 살고 공부만 했다면
그런 편지도 못 받았을 거야. 어렵게 살았기 때문에 이런
순간이 있는 거지.”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덧없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그래도 스스로 ‘성공한 인생’이라 자부하는 인생은 꽤 괜찮은
인생 아닐까. 남은 생, 지금까지 해오던 것처럼 기부를 실천하겠다 약속하는 김정웅 어르신의 목소리가 더없이 힘차다.
“부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부자 되는 게 성공하는 거고, 저는 사람을 돕고 싶었는데 그걸 이루었으니 성공한
거지요. 부자가 따로 있습니까. 자기 원하는 것을 이루고
언제든 훌훌 떠날 수 있으면 부자지요.”
글 임승주 / 사진 정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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